뮐렌스테트로부터 배운 기술 관료의 덕목

2015년 1월, 교환학생으로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에서 공부하기 위해 인천 공항에서 출발해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미리 사 온 선불 유심칩을 스마트폰에 끼운 뒤에 시내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출발하는 전철을 탔다. 숙소로 가는 경로를 검색하려고 구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켰는데 우리나라 전철에는 당연히 설치되어 있는 전철용 와이파이가 없었다. 결국 와이파이를 끄고 무선 통신망으로 검색하려는데 공항이 시 외곽에 있어서 그런지 3G도 아니고 2G 네트워크가 잡혔다. 구글 지도로 숙소까지 검색하는데 5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날부터 전철에서 인터넷을 써보려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우리나라의 통신망이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전국 어디에서나 LTE 망을 이용하고, 지하철과 심지어 KTX 안에서도 무료로 와이파이를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망이 덴마크에서 온 외국인 뮐렌스테트(H. J. Muhlensteth)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Muhlensteth

서대문 자택 앞에 서 있는 뮐렌스테트(왼쪽)와 그의 형(오른쪽) 30

조선 내 최초의 전선 가설을 감독했던 뮐렌스테트

1885년 4월에 청, 일 양국은 톈진 조약으로 조선에서 군대를 거두어들인다. 청국은 그 직후에 조선에 관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받아 대응할 목적으로 6월에 조선과 의주전선합동을 체결하고 인천에서 서울과 의주를 거쳐 청국 봉황성에 이르는 서로 전선을 가설하기로 한다. 1 당시 뮐렌스테트가 청국 전보총국에 일하고 있었는데 이 서로 전선의 기술감독관으로 조선에 파견을 나오게 된다.2 그때는 덴마크와 수교도 맺기 전이었는데 왜 하필 덴마크 사람인 뮐렌스테트가 조선으로 오게 되었을까? 당시 대북부전신회사(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가 러시아에서 1869년에 전신선을 설치할 수 있는 독점권을 얻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중에 있었다.3 이 대북부전신회사가 덴마크 회사였고 뮐렌스테트가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청국 전보총국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전신선을 지을 돈도, 기술력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로 전선은 청국으로부터 차관으로 은 10만 냥을 빌려서 전적으로 뮐렌스테트의 감독하에 청국의 기술자들이 설치했다. 2 조선이 한 일은 청국의 요청으로 장교와 순병들을 보내서 공사 현장과 시설물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4 게다가 서로 전선의 운영을 맡은 한성 전보총국도 청국이 운영과 관리를 담당해서 전반적인 운영권마저 청국이 가져갔는데 유지비는 조선이 부담해야 했다. 5 서로 전선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완전히 청국의 주도로 만든 전신선이었지만 조선 내에 지은 최초의 전신선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또한 이후 조선이 주도적으로 전신선을 설치할 수 있게 되는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서로 전선을 지을 때 한성 전보총국을 통해서 학생을 파견해서 기술을 익히도록 했고 이들이 추후에 지은 전신선 가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6 그리고 뮐렌스테트에게 서로 전선은 그가 죽을 때까지 머무르게 될 조선에서의 첫 과제이자 전신 기술자로서 꿈을 펼치는 첫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 정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남로 전선 건설

청국이 조선에 전신선을 설치하자 이번에는 일본에서 서울과 부산에 전신선을 연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1884년에 일본은 이미 부산과 일본을 잇는 해저전신선을 가설했고 이때 부산구설 해저전선 조관을 맺어서 해외 전선을 가설할 때 반드시 부산에 있는 전신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7 조선에서는 전선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추가로 지을 형편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계속 거절했는데, 의주전선합동 때 해륙 전신선 부설권을 독점하는 조약을 넣었던 청국이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 전선을 대신 건설하기로 한다.8 하지만 청국은 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는데9 아무래도 남로 전선은 일본에게 도움이 될 뿐 그들에게는 득이 될 것이 없었기에 진행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뮐렌스테트는 남로 전선에서도 기술 책임자로 임명되어 일을 진행했으며 전신선을 설치하기 전 측량 업무를 대부분 도맡아 감독했다. 10 하지만 청국이 필요 설비를 제때 보내주지 않으며 작업이 지연됐고 조선은 독자적으로 남로 전선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조선전보총국을 신설해서 세창양행으로부터 직접 기자재를 수입했고 영국인 핼리팩스를 고용해 일부 경로를 재측정한 후에 1888년 5월 27일 완공했다. 7

남로전선은 서로전선과 달리 조선이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청국에서 관리하는 한성총국 대신에 전신 전담 관청인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해 건설과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남로전선을 지으면서 청국과 맺었던 윤양육로의정을 보면 가설에 서양인기술자 1명을 고용하도록 했는데, 파견을 나왔던 뮐렌스테트가 아니라 조선전보총국에서 직접 핼리팩스를 고용해서 측량을 맡겼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처음 통신망을 설치하는 데 기여한 외국인은 뮐렌스테트가 아니라 핼리팩스 아닐까? 분명 서로 전선보다는 남로 전선이 우리나라에서 주도적으로 지은 최초의 전선이니 말이다. 처음에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째서 뮐렌스테트가 조선의 정보 통신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외국인이 되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핼리팩스는 남로 전선 가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본인의 원래 업무였던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뮐렌스테트는 조선에 남아 기술 교육을 한다.

전무학당 전보 교사로 근무

뮐렌스테트의 행보를 보면 그가 다른 외국인 기술자들과는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뮐렌스테트는 전신선 공사를 감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신선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인력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는 점이다. 뮐렌스테트는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성 전보총국이 철수할 때 청국으로 되돌아갔다가 1895년 5월에 독일공사를 통해서 조선 정부에 전신업무에 종사하고자 지원한다. 11 조선 정부는 1년이 지나서 1896년 6월경에 농상공부의 전무교사로 뮐렌스테트를 채용했다.12 이때부터 뮐렌스테트는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통신권을 일본에 빼앗기기 전까지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전무학도 양성을 위해 일했다.13

그의 속빙계약서14를 보면 전보교사의 임무와 함께 기술지도, 해외자문과 기획고문 역할도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2 1899년 12월 9일에 고종으로부터 3품 옥훈장을 받았을 때 내용을 보면15 교육자로서 그의 공헌이 조선에 있어 매우 귀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핼리팩스가 영어 교사로 재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으며 이 점이 우리나라의 정보 통신사에서 그가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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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학당이거나 초창기 전보사 내부의 작업 풍경으로 추정되는 사진 31

1905년에 통신권이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전무학당도 함께 폐지되었지만16 뮐렌스테트가 9년 동안 조선에 인적 자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1953년에 정보통신분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시 용산구에 체신고등학교가 세워졌다. 전무학당이 1905년에 폐지되고 50년이 지나서야 생긴 교육기관이라 사실 전무학당과 체신고등학교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학교를 설립하면서 일제 강점기 직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정보 통신 교육 기관이었던 전무학당을 학교의 전신으로 삼았다.17 그 덕분에 전무학당에 관한 자세한 조사가 학교 설립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이후 졸업생들도 학교 뿌리 찾기의 일환으로 많은 조사를 벌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체신고교 출신인 경희대 전자전파공학과 진용옥 교수다. 진용옥 교수는 1986년에 처음으로 뮐렌스테트의 묘지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어서 그가 1905년 이후에도 한반도에 남아 이 땅에서 죽었다는 것을 밝혀냈다.18 또한 실록을 포함한 사료들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내어 그때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던 뮐렌스테트의 업적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알아냈다. 뮐렌스테트가 1915년 우리나라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그가 교육자로서 뿌린 씨앗이 80년을 지나 그의 공로를 밝혀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뮐렌스테트는 조선의 전신 사업을 시작하는 데 공헌했던 외국인 중 그나마 관련된 자료가 시중에 가장 많이 나와 있다.

항일 운동에도 일부 관여: 양기탁과 베델 소개

뮐렌스테트가 일반적인 기술자들과 달랐던 또 하나의 특징은 과학 기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정치적인 항일 운동에도 일부 관여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일화로,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의도를 알리기 위해 코리아 타임스라는 영자 신문을 발갂하고자 했던 양기탁에게 베델을 소개해준 사람이 뮐렌스테트이다. 양기탁이 1903년에 전신, 전무의 한국어 번역 업무를 맡기 위해 한성전기회사에 입사하였는데 이때 뮐렌스테트는 기술고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19 베델은 1904년 서울에 와서 통역이 필요하였는데 뮐렌스테트가 양기탁과 베델을 소개해줬다. 20 베델과 양기탁은 코리아 타임즈 뿐만 아니라 베델이 영국인이라는 점을 활용해 그를 발행인으로 하여 항일 논조를 견지한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할 수 있었다. 이 일 외에도 그가 재임 중에는 일본과의 교섭에서 언제나 불공정한 조건에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전해지며 21 청일전쟁 중에는 일본군에 포로로 좌세보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11 한일합방 과정에 전보국을 떠날 때도 다른 외국인들은 의원 해임된 반면에 그는 파면된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22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누군가는 뮐렌스테트의 항일적인 활동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시대적인 흐름을 인지 못 했던 기술자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전신 기술자와 교육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기회를 준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답하고자 했던 의로운 행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이 독립하고 대한민국이 기적처럼 세계적인 강소국으로 발전한 지금의 상황을 봤을 때 나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본다. 체신고교 출신들과 정보통신 관련 부서에서 뮐렌스테트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그가 보여준 항일적인 모습들이 알려진 반면 그와 비슷하게 우체 교사로 근무했던 프랑스인 클레망세는 일본 측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배임 행위를 한 것이 밝혀졌다.22 뮐렌스테트는 우리나라의 통신사에서 꽤 비중 있게 첫 시작을 연 사람으로 다뤄지고 있지만 클레망세는 앞에 언급한 일과 함께 우표를 제작할 때도 프랑스 정부에 특혜를 준 것으로 알려져23 그 업적이 많은 부분 평가 절하됐다. 반면 뮐렌스테트의 정치적 활동이 그의 기술적인 업적을 오늘날 온전하게 평가받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돋보이게 했기에 그의 선택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에티오피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과학자와 공학자들

뮐렌스테트를 조사하면서 나도 과학 기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먼저 공학자로서 내가 가진 공학적 지식을 사용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것, 특히 기술적인 인적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게 훗날 훨씬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에 우리 학교로 공부하러 에티오피아에서 온 하비타무라는 친구와 나눈 얘기가 생각난다. 얘기를 나누다 예전에 신문에서 중국이 아프리카에 엄청나게 투자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래서 중국에 관한 인식이 아주 긍정적일 거라 생각하고 그 점을 물어봤는데 예상외의 답을 했다.

“중국 별로 좋아하지 않아. 중국은 개발할 때 다 중국 사람들만 데리고 오고 음식도 우리가 먹지않는 재료를 수입해서 중국 음식만 해 먹어. 개발할 때 좋은 일자리는 다 중국인들이 일해. 오히려 아디스 아바바(에티오피아 수도)에서 한국인들을 더 좋게 생각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에티오피아에서 카이스트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과학 기술 특성화 대학교인 AAiT(Addis Abab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학장으로 있는 김영균 교수의 얘기를 해줬다. 그분이 AAiT로 와서 학교 시스템도 개선하고 카이스트 같은 좋은 학교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 간 협약도 맺어줘서 자기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정확히 이름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김영균 학장 외에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학교들에 한국인 교수들이 많이 진출해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그 얘기를 들을 때는 아직 산업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에서의 교육이 얼마나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뮐렌스테트에 관해 조사를 하고 나니 그 투자의 가치가 다르게 보였다. 개발한 시설은 세월이 흐르면 대부분 없어지고 새로 지어진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사람에 투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보상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뮐렌스테트를 통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과 청국이 지은 전신선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바뀌었지만 그가 가르쳤던 전무학당을 전신으로 한 체신고교 출신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정보통신 관련 정부 부처와 학교, 회사에서 중요한 자리에서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4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한 후에 연구 환경이 좋고 컴퓨터 관련 산업도 발달해 있는 미국에서 일하는 것만이 내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뮐렌스테트를 조사하면서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나라에서 그곳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도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내가 나중에 어디에서 일을 시작하건 간에 나에게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뮐렌스테트를 조사한 기억 때문에 내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자이지만 경영 수완을 보여주었던 운산 금광 전선 계약

뮐렌스테트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점은 그가 기술자임에도 나름의 경영적인 수완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1899년 9월에 운산 금광 운영을 더 수월하게 하고자 운산에서 북진을 연결하는 전신선을 지어줄 것을 미국이 요청한다. 이때 뮐렌스테트가 이 전신선이 오직 미국의 운산 금광 운영만을 위한 것이므로 미국이 고정된 정해진 액수를 매년 내는 것으로 약정한다. 그 당시에는 전보마다 비용을 매기는 방식을 사용했었는데 뮐렌스테트는 미국이 매월 200달러를 2년 동안 내도록 계약을 맺었다. 25 이전까지 청국, 일본과 맺었던 불공평한 계약과 비교하면 사용국인 미국에 명확하게 비용을 지불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전보 수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고정 수익을 낼 수 있는 조선 내에서 최초의 전용선 계약이었다. 25 뮐렌스테트는 이 외에도 1901년에 법규교정소의 의정관, 외부서리 고문관으로도 임명됐고 1902년에는 농상공부 연해검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가 열강이 아닌 덴마크에서 왔지만 조선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해외 자문, 기획 고문관과 행정가로도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러한 수완도 분명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일이 재밌어서 대학원 유학을 준비하고 있지만 대학원 졸업 후에 기업가로서의 진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학계에서 하는 일이 산업계와 차이가 크지 않은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는 대학원생, 연구원 혹은 교수들이 창업해서 세상을 직접 성공적으로 바꿔나가는 사례가 정말 많다. 하지만 엔지니어로서 핵심적인 기여를 하고도 회사가 성장하면서 요직에서 밀려나고 기여한 것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데 애플을 창업했던 스티브 워즈니악이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는 넥슨과 엔씨소프트 초기에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만들어 회사를 먹여 살리다시피 했던 송재경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경영을 같이 전공해서 기업가에게 필요한 공부도 하고 있고 전공과 관련 없어 보이는 시사나 정치 문제도 시간을 들여서 놓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그런 노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시간을 투자하지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뮐렌스테트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언젠가 내가 뮐렌스테트처럼 어떤 조직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라갔을 때 내가 들였던 노력이 분명 큰 보상으로 돌아오리라는 좀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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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뮐렌스테트의 무덤 32

이후 뮐렌스테트의 행적과 덴마크에서 찾은 그의 흔적

1905년에 3월에 통신권이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가면서 뮐렌스테트는 해고를 당했다. 이때 사임했던 프랑스 우체교사 클레망세는 상여금과 귀국여비로 3,150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뮐렌스테트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덴마크 공사가 없어서 프랑스 공사를 통해서 상여금과 귀국여비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1 열강이 아니고 수교도 맺지 않은 덴마크에서 온 탓에 이 외에도 조선에서 일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파직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한국에 머물면서 수입상을 경영했다는 얘기가 있다. 26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진용옥 경희대 교수가 뮐렌스테트의 묘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발견하면서 그가 덴마크가 아니라 조선에서 1915년 2월 17일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5년 2월 19일 매일신보에 그가 심장병을 비관해서 권총 자살을 했다고 보도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인인지는 불명확하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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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우편 전신 박물관에 있는 뮐렌스테트의 사진 27

덴마크 내에서는 뮐렌스테트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덴마크 구글에서 뮐렌스테트에 관해 찾아보았는데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 우편 전신 박물관(Post & Tele Museum) 홈페이지27 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사망 날짜도 비어 있고 설명란에도 조촐하게 덴마크에서의 고용 연도만 나와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자료도 없는 거로 봤을 때 덴마크에서는 조선에서 그의 업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듯하다. 2003년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에서 정보통신 100년사를 쓰면서 뮐렌스테트에 관해 꽤 많은 자료 정리를 했는데도 거기서 그친 것이 아쉽다. 동아시아 변방의 나라 조선과 열강이 아니었던 북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 사이에 100년도 더 전에 의미 있는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외교적으로 분명 가치가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덴마크가 작은 나라이고 한국의 주요 무역국도 아니기에 외면받은 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강대국에서 온 외국인이 아니란 이유로 홀대받는 부분이 많아 개인적으로 아쉽다. 정보통신 진흥원에서 정보통신망 역사를 개시해 놓은 한글 웹페이지를 영어로 읽을 수 있게 번역만 해놓아도 해외에서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뮐렌스테트의 공헌을 덴마크와 해외에도 알려야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있던 두 대의 컴퓨터가 인터넷 표준 프로토콜을 통해서 데이터를 교환했다.28 우리나라 최초이자 전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인터넷을 구축하는 순간이었다.29 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사실상 혼자서 주도한 사람이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이스트 명예 교수 전길남 박사이다. 1880년대에 전신선을 청국과 일본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도입했으나 100년이 지나 일본과 중국보다도 먼저 인터넷을 구축하고 개발도상국들에 노하우를 전수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뮐렌스테트가 우리나라 통신 역사에 기여한 부분을 덴마크에서도 명확히 알게 하고 가능하다면 누구에게나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최고의 정보 통신망을 가지게 된 데에 조선 최초의 전신선 설치를 감독하고 기술자를 양성했던 뮐렌스테트가 공헌한 부분이 있다.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 공학기술자들이 가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공헌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는 그의 업적이 나처럼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역사에 관심 있는 일부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덴마크 사람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1. 의주전선합동 체결과 서로전선 개통, 정보통신 20세기사(http://20c.itfind.or.kr/),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2. p.317, 인물 과학사 2: 세계의 과학자들, 박성래, 도서출판 책과함께, 2011

  3. p.17, GN Store Nord: A Company in Transition, 1939-1988, Martin J. Iversen, Copenhagen Business School Press DK, 2005

  4. 전신선로의 보호, 전기통신 100년사(http://20c.itfind.or.kr/) ,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5. 의주전선합동, 정보통신 20세기사(http://20c.itfind.or.kr/),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6. 조선전보총국 개설 및 업무, 정보통신 20세기사(http://20c.itfind.or.kr/),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7. p.21, 근대문화유산전기통신(우정분야)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07

  8. 남로전선(南路電線) 가설 추진 배경, 정보통신 20세기사(http://20c.itfind.or.kr/),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9. p.270, 한국사 46: 신문화운동 II, 국사편찬위원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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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p.267, 정보와 통신의 원형을 찾아서: 봉화에서 텔레파시통신까지, 진용옥, 지성사, 1986

  12. p.319, 인물 과학사 2: 세계의 과학자들, 박성래, 도서출판 책과함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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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단국인미륜사속빙합동조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15. 고종 실록 39권(http://sillok.history.go.kr/id/kza13612009001), 고종 36년 12월 9일 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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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p.226, 梁起鐸과 民族運動, 윤경로, 국사관논총 제10집, 국사편찬위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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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p.69, 정보통신 역사기행, 이기열, 북스토리, 2006

  22. 전보교사 미륜사, 전기통신 100년사(http://20c.itfind.or.kr/) ,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 정책기획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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